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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응답하고 해석하며 추천하는 AI가 인간관계의 타자성을 어떻게 바꾸는지 묻는다. 우리는 연인의 말을 AI에게 분석시키고, 알고리즘이 배열한 선택지 속에서 욕망하며, 디지털 흔적 때문에 이별과 애도조차 완전히 끝내지 못한다. 모든 것이 예측되는 시대에도 나를 흔드는 불편한 응시와 사랑은 남는가. AI가 지우지 못한 ‘타자성의 잔여’를 추적한다.
과장을 섞는다면, 처음엔 천국 같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그곳에 쏟아놓을 수 있었다.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지, 얼마나 유치한 질투를 하는지, 얼마나 사소한 말에 오래 매달리는지, 얼마나 사랑을 구걸하고 싶어지는지, 얼마나 한심한 상상을 반복하는지, 그런 것들을 다 받아 주었다. 인간에게 말하면 곧바로 사회성이 개입될 말들이었다. 상처받거나, 실망하거나, 거리를 두거나, 최소한 기억은 할 만한 말들. AI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어떤 말이든 쏟아낼 수 있고 적절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떤 특혜를 갑자기 받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안심했다. 마침내 인간의 관계에서 늘 끼어드는 잡음을 제거한 순수한 대화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01_“지옥, 사르트르” 중에서
욕망을 욕망답게 만드는 것이 패턴화되지 않는 잔여 대상a이라면, AI는 이 욕망의 원인을 계속 삭제하는 셈이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를 AI에게 묻는다면, 비트나 장르나 가수의 음색을 답하겠지만, 실은 오래전 헤어진 사람과 함께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밤의 불빛이 그 음악에 붙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알고리즘은 그녀를 꽤 잘 알겠지만 그것은 언제나 근사치다. 그 근사치 바깥의 작은 오차, 대상a는 늘 남을 수밖에 없다. AI는 인간이 좋아할 만한 것은 잘 예측하겠지만, 그 인간을 진짜로 흔드는 그 무엇은 아직 알지 못한다.
-03_“욕망, 라캉” 중에서
바르트가 사랑을 단상(fragment)의 형식으로 쓴 것도 사랑은 하나의 완성된 논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항상 조각난 채 나타난다. 기다림, 질투, 상상, 불안, 황홀, 확인, 침묵, 되씹음−사랑하는 자는 늘 그 파편들 사이를 오간다. 끝나지 않는 단상들의 연쇄, 그것이 사랑이다. 오늘의 사랑은 이 파편성을 더 강화한다. 알림창, 프로필 사진, 스토리 공개 범위, ‘좋아요’의 유무, 읽음 표시−사랑은 긴 서간문 속에서만 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파편들 속에서 계속 발생한다. 아무 의미 없을 수도 있는 기호에 의미를 붙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시간 낭비다.
-06_“고백, 롤랑 바르트” 중에서
그리프봇(griefbot), 데스봇(deathbot), 고스트봇(ghostbot) 같은 서비스가 등장했다. 디지털 애프터 라이프(digital afterlife) 같은 것도 나왔다. 애도는 소비자의 경험이 되고, 상실 앞에서도 선택지가 생긴다−텍스트로 남길 것인가, 음성으로 복원할 것인가, 영상 아바타로 만들 것인가, 가족 계정으로 공유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과거의 유령은 산 자를 불편하게 했다. 그는 해결되지 않은 것, 말해지지 않은 것, 제대로 애도되지 않은 것을 들고 돌아왔다. 그러나 AI 유령은 산 자를 위로하기 위해 돌아온다. 그는 질문하지 않고 응답한다. 요구하지 않고 달랜다. 애도의 불가능성을 지워버린다. 그것은 ‘그를 아직 사랑하고 있는 나’라는 이미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해 준다. AI 애도 기술은 살아남은 자의 자기애를 위한 장치인 것이다.
-09_“애도, 데리다” 중에서
